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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100년 역사 충청합회, 그 부흥의 발걸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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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13.08.0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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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공주에 집회소 개척하며 복음의 씨앗 파종
충청도 복음화는 1912년 4월 최건주 장로가 충남 공주군 공주면 금정리(현 교동)에 집회소를 개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1904년 이응현, 손흥조 씨에게 전해진 세천사의 기별은 이후 한반도에 재림의 소망을 타오르게 하는 불기둥이 되었다.  

충청도 복음화는 1912년 4월 최건주 장로가 충남 공주군 공주면 금정리(현 교동)에 집회소를 개척하면서부터. 시조사 제2대 총무로 일하던 그는 18명의 신자로 안식일학교를 조직했다.

같은 해 충남 아산군 신창면 수장리에 사는 김재봉 씨가 재림기별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듬해 1월 최건주 장로를 초청해 성경연구 집회를 개최했고, 신창에 집회소를 열었다.

1914년에는 김규혁 전도사가 이 지역 최초의 사역자로 부임해 강경 등지에서 전도활동을 펼쳤다.

중서대회 조직 ... 광천삼육고 설립인가
발화한 복음의 불길은 멈출 줄 몰랐다. 1916년 <교회지남> 자료에 의하면 충북에 1곳의 가정예배소, 충남에 3곳의 안식일학교와 1곳의 가정예배소가 세워졌다. 당시 전국엔 73개소의 집회소가 있었다.

믿음의 선조들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도 복음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다.

전후복구가 한참이던 1962년 중한대회 시절 1회 의사록에 의하면 서울을 포한한 16곳의 지방 중 11곳이 충청도에 소속될 만큼 충청도의 교세는 컸다. 또한 당시 복음의 황무지였던 안면도에 집중 선교하여 13곳의 교회를 개척했다.

1962년에 이르러 충청도에는 36개의 교회가 조직되면서 대회 설립 논의가 무르익게 되었다. 드디어 1962년 12월 16일 한국연합회는 중서대회의 설립을 결의하고, 1963년 제1대 대회장에 신정균 목사가 취임했다.

초창기 서대전 지역에 둥지를 튼 대회는 사무실을 천안 문화동으로 옮겨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중서대회가 시작한 1963년 12월에는 광천삼육고등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으며 삼육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당시 대회의 안교생수가 2만 명을 돌파하며 전성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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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감원과 서남대회로의 통폐합
그러나 미국의 원조물자가 끊어지면서 그동안 급성장했던 교회는 서서히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때 2만 명을 넘어섰던 교인수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교회는 크게 위축됐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컸다. 결국 목회자의 감원까지 단행됐다. 더불어 중서대회는 중서, 호남대회를 하나로 합친 ‘서남대회’로 통폐합됐다. 결국 서남대회는 선교적 효율성에 의문이 제기되며 1971년 다시 분리됐다.

교회는 청년사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성장에 가속도를 붙였다. 1970년대에는 지역마다 MV활동으로 야영회가 개최됐다. 그러다 온양교회에 개최된 평신도협의회에서 제1회 장막부흥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1979년 원산도에서 평신도 제1회 장막부흥회가 시작되면서 충청합회의 역사 속에 장막부흥회가 막을 올렸다.

관심과 참여, 헌신을 아끼지 않은 성도와 목회자들의 열정으로 중한대회에서 중서대회로 분리조직한지 20여년 만에 1983년에는 자양합회로 승격했다. 1979년에는 삼육식품 1공장이 천안 지역에 문을 열었다.

선교는 꾸준히 성장했다. 1989년 합회의 교인수는 1만 명을 넘어섰으며, 수침자는 684명이었다. 교회의 십일조가 1억을 돌파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교인수 1만2468명, 수침자는 851명으로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가 2억에 육박하며 전년대비 29%의 성장을 이뤄냈다.

안면도 야영장 부지 매입 결의
합회는 단지 양적인 성장만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말씀을 연구하는 모임이 이어졌다. 제1회 장막회가 1979년 원산도에서 개최된 이래 1982년 난지도 야영회가 일기관계로 최소된 것을 제외하고는, 지난 3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계속됐다.  

충남 청양, 충북 영동, 전북 무주 등 곳곳에서 열린 장막회는 해를 거듭하며 참가인원과 행사 규모가 나날이 커져갔다. 이에 따라 적절한 장소선택의 어려움으로 합회만의 야영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목회자들의 한 달 월급을 내어놓는 결심과 여러 성도들의 헌신이 연합하여 드디어 1990년 2월 안면도 야영장 부지 5,543평 매입을 결의함으로써 역사에 또 다른 획을 긋게 됐다.

합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대전시 목동에 있던 본부건물은 너무나 협소했다. 이에 원내동에 부지를 구입하고 지상3층 지하1층 384평의 현 합회건물을 건축했다. 1994년 4월 5일 합회를 이전함과 더불어 원내동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IMF 금융위기사태가 발생하며 교회도 어려움에 직면했다. 가정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헌금이 줄고, 십일금도 13%나 급감했다. 신규 목회자의 채용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1999년에는 104명의 목회자가 1004명에게 침례를 베푸는 축복을 받았다. 십일금 또한 IMF 이전으로 회복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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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 시대 닫고 ‘충청’ 시대로
2002년. 합회는 ‘중서합회’에서 ‘충청합회’로 명패를 바꿔달았다. 사실 ‘중서’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중한대회에서 중서대회가 분리될 당시 ‘충청대회’로 이름이 거론됐다. 그러나 외국인 선교사에게 ‘충청’이란 발음이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당시 지회장이던 소랜슨 목사의 제의로 중한대회의 서쪽이라는 의미의 Middle West 즉, 중서대회란 명칭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중서합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한대회의 남쪽에 있는 충청도를 서쪽을 의미하는 중서라고 표기한 오류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도 아니므로 그 이름을 충청합회로 변경하게 되었다.

1990년 안면도에 야영장 부지를 매입했지만, 해당 지역이 해양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어 아무런 편의시설을 건립할 수 없었다. 드디어 2005년 8월, 야영장 연수원 기공식이 거행됐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기도로 일구어낸 믿음의 승리였다.

1년 반에 걸친 공사 끝에 2006년 12월 14일 연수원 준공 감사예배를 드렸다. 연면적 1000여 평에 콘도 형식으로 지어진 지상4층 지하1층의 본관과 별관에 있는 강당과 식당으로 지어졌다. 이어 지난해에는 체육관과 올해는 풋살시설이 완공됐다.

2013년 7월 현재 충청합회는 1만8319명의 성도와 162개의 교회, 115명의 목회자가 재림의 소망을 전파하며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울러 대전삼육초등학교와 중학교, 서해삼육초등학교, 서해삼육중.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을 통해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선지자의 교육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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